크로키

1. 깊은 사색을 마치고 보내는 답장메일


오~ 귀영, 답장이 늦어서 미안!!! 늦어도 너무 늦었지?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너와 인연을 끊으려고 수작하는 거냐는 오해를 하다니. 나 혼자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너의 겁먹은 투정이 생소하고 재밌어서. 그곳에서 혼자 쓸쓸히 지내다 보니까 귀영 너도 소심해질 때가 있구나 싶어서 말이야.

내가 어떻게 감히 너랑 인연을 끊을 생각을 하겠니? 내 유일한 소통의 길이 너인데. 인연이란 거 만나기도, 만들기도 어려운데 기존인연이라도 지켜야하지 않겠어?^^

귀영, 내가 오늘 너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게 된 중요한 이유 두 가지가 있어. 굳이 이유라기보다는 네게 반드시 알려야 할 중요한 사안이 생겼다고 할 수 있지.

나도 네 맘, 입장, 충분히 이해해. 나또한 요즘 굉장히 소심해지고 쓸쓸하게 지냈거든.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아니, 몇 번쯤은 슬럼프를 겪게 되는 거 같아. 나 또한 내 인생에서 이보다 더한 슬럼프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호되게 첫 슬럼프에 녹다운됐었어. 그래서 아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고독을 씹고 뱉어내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하지만 너도 이번의 내 답장을 읽어보면 내가 왜 일 년 동안 너에게 답장을 못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호오~ 지금까지 살아온 내 33년간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느라 여념이 없었거든.

오늘밤, 슬럼프를 극복한 기념으로 너에게 가장먼저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난 지금 무척이나 들떠있어. 이런 들뜬 기분을 얼마 만에 느끼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내 소식을 알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지 몰라. 정말이지 간만에 마음이 급해지는걸.

음…. 컴퓨터를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잠시 부동자세로 있었어. 너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내 모습을 잠시 동안 감상하고 있었거든. 아~ 뿌듯하다. 좋아!

그동안 너에 대한 나의 무심함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고픈 마음에 가장 예쁜 편지지를 골랐어. 음, 맘에 들어. 네 맘에도 들길 바라는 맘으로 잠시 경건한 자세를 취해봤어. 내 마음에 드는 편지지니까 분명 네 맘에도 들 거라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