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표_산문집총서_05]_지상의 선택

이십대에는 시를 쓰고 사십대에는 수필을 쓴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수필은 인생의 오랜 연륜과 경험과 철학과 삶의 지혜를 요구하는 문학 장르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문학의 장르가 연령과 비례한다는 정설은 없다. 이십대에도 번뜩이는 감성의 수필을 쓸 수 있고 사십대에도 훌륭한 시를 쓸 수 있기에 말이다. 그래도 사십대에 수필을 쓴다는 말은 뭔가 수필이 갖는 독특한 성격을 지적한 말이라 하겠다.
수필은 비록 붓 가는 대로 쓰는 무형식의 자유로운 글이라고는 하지만 삶의 진지한 이력이 있고, 감동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거기에 문장의 아름다움까지 곁들여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할 때, 산전수전을 경험한 인생의 경륜이야말로 그러한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는데 매우 유리한 요소임에 틀림없기에 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사십대를 넘겨서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게 된 것이다. 문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하고, 비평하고, 시를 통하여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 땅의 한 남성으로, 가장으로, 시인으로, 다사다난한 역사의 강물을 타고 시대를 살아야 했던 생존의 과정에서, 날마다 기적처럼 맞이해야 했던 하루하루의 황홀한 삶과, 불안과 설레임과 아쉬움으로 방황해야 했던 외로운 날들을 경험하면서, 이제는 다가오는 삶의 시간과 내 자신의 이웃과 시대와 운명의 신비로운 유혹들을 감지하면서 나도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심과 실천들이 어느덧 오십대 후반으로 넘어오게 되니 이제는 그 동안의 발언들이 상당수의 문장으로 남게 되었고 이번에는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조금은 정리된 언어로 독자와 더불어 공감해야겠다는 외람된 욕심을 내기로 한 것이다.
수필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자기와 자기 주변의 사사로운 일들을 잡다하게 서술하는 신변잡기, 즉 경수필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좀 더 사회적인 문제, 또는 인생의 문제를 보다 논의적으로 말하는 중수필이 그것이다. 인생이란 결국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라는 삶의 이중적 실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삶을 표현하는 수필에 있어서도 이러한 두 가지 형식은 그 나름의 정당성을 갖는다 하겠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되는 수필집 「지상의 선택」은 보다 심층적이고 논의적인 포멀 에세이에 비중을 두었다. 말하자면 몽테뉴형의 수필이 아니라 베이컨형의 수필이란 말이다.
시중의 수많은 수필집들을 보면서 때로는 사소한 일들이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신변의 허세가 오히려 독자를 식상하게 하는 사례들을 보게 된다. 붓 가는 대로 자유롭게 쓴다는 수필의 원칙을, 멋대로 쓰는 허세의 말장난으로 오해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모든 문학이 그렇듯이 수필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성이다. 그 자신에 대하여 역사와 삶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그리고 세계와 우주와 존재에 대한 진실성의 기록인 것이다. 그 진실성이 개인의 특유한 멋과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어우러질 때, 수필 문학의 정당한 자리가 있고, 수필의 문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